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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문화재돌봄의 현장에 가다
작성자 : 행정실 ㅣ 조회수 : 332

“남원 금남재와 풍계서원,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 ”
전 경 미-예원예술대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전 경 미-예원예술대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남원은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을 품은 광한루, 잘 정비된 요천, 국립국악원의 여러 생사 등등 볼거리도 많고 문화재도 많다. 오늘 이 지면에 소개하고 싶은 문화재는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 금남재와 풍계서원이다. 이 2곳은 함양오씨와 관련된 문화재로 지금도 ‘학당’으로 쓰여도 손색없는 목조한옥건물이다. 세련된 화장실이 없는 것을 제외하곤......
금남재는 조선시대에 오응(吳凝)이라는 분이 세웠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이고 있어서 검소하면서, 평면은 ㄷ자형이고, 화강암을 잘 다듬은 높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 중앙에 일자형 대청마루 공간과 그 좌우에 각각 건물을 처마 아래로 이어 달아 4동 중정형의 아늑하고 고요하면서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건물이다. 우측 즉 동쪽의 건물에는 2칸의 방과 1칸의 마루를 구성하였고, 몸채와의 사이에 부엌 겸 술산사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배치되었다. 좌측 즉 서쪽 건물은 1칸씩의 2개의 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맞배지붕에 홑처마이고 네모진 기둥을 사용하였다. 몸채 중앙간 상부에는 권직상이 쓴 ‘錦南齋’라는 당호가 걸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오씨는 해주오씨와 함양오씨, 보성오씨 등이 있고 해주오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오씨의 시조는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으로 중국에서 귀화했는데,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500년에 혼란을 피해 무역선을 타고 전라남도 해남에 도착했다고 한다. 함양오씨는 오광휘(光輝)가 함양에 입향 하면서부터 시조가 되었는데, 그는 고려 명종 말년부터 고종 때까지 관직에 나아갔다. 광휘는 금남재 오응의 7세조로 고려에서 상서성 좌복야(상서성은 모든 벼슬아치를 관할하던 관청으로. 이곳의 정2품 벼슬에 해당하는 관직: 현재로 보면 부총리정도에 해당할 것임)에 임명되었다가 흥위위상장군(고려시대 군사제도로 중앙군대인 응양군, 용호군은 국왕의 친위부대며,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의 핵심부대와 금오위;경찰에 해당, 천우위;의장에 해당, 감문위;궁성문 수비의 6위로 구성)과 함양부원군(부원군은 임금의 장인 또는 친공신에게 주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한 명문가문의 후손으로 출생한 오응은 1457년(세조 3)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좌정언을 거쳐 1467년 함길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예종 때에는 한성부좌윤과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금남재는 별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문중의 후손인 오병수님은 ‘학당’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 건물은 ㄷ자형 평면을 지녔는데 시계방향으로 45도 돌린 평면으로, 가운데에 一자형 4칸의 넓은 마루에서 오응선생이 가르쳤고, 학생들이 좌우의 달린 방에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금남재 옆에는 오응의 할아버지인 오상덕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오상덕을 기념하는 술산사라는 제각이 있다. 오상덕은 황희의 매형이자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여 살았던 충절의 사람이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당시의 조정 관료들이 조선에 반대하여 조복(임금에게 나아갈 때 입는 옷)을 벗어던지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여 여기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비롯되기도 하였다. 오응은 할아버지 오상덕을 퍽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금남재를 짓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금남재의 동쪽에 2칸의 방이 있고 술산사로 통하는 중문을 달아낸 것을 보면 그렇다. 아마도 오응은 매일 술산사로 나아가 먼지도 털고 문도 열어 놓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풀도 뽑았을 것이다.
남원시 대강면에 가면 풍계서원이 있다. 황희와 오상덕, 황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들을 따르는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다. 3칸의 창덕사와 내신문, 5칸의 강당과 4칸의 동재, 외신문, 고사 등이 있는 그야말로 작은 학교이다. 풍계서원의 창덕사 건물 벽에는 두문동72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상덕이 황희의 매형으로 풍계서원에서 함께 봉안된 것은 아마도 그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 방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 전 내가 금남재를 방문했을 때, 마침 문중의 후손인 오병수님을 만났다. (재)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 문화재돌봄 전북동부권 사업단이 해마다 실시하는 소유자관리자 교육을 통해 후손이 해야 할 ‘환기환풍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시느라 나오셨다고 한다. 올해 ‘큰집 조카가 고고학박사를 땄고 또 오병수님의 아드님이 컴퓨터공학 쪽의 박사학위를 땄다’고 자랑하셨다. 우리의 전통적인 신앙에 의지하여 ‘선생님이 금남재 관리를 잘 하시니 조상님이 감동하여 돌봐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애써 노력한 후손의 공이 조상덕으로 치부될까봐 말을 아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다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붕대를 메고 계셨는데 마음이 찡했다. 소유자관리자 교육에서 강조한 것처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것들을 관리할 수 있는 차세대가 세워져야 한다. 

 출저: 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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